"한참 후/ 양쪽 발소리가 다른 여인이/ 입구 쪽으로 천천히 나가고 있었다"(「능가사 벚꽃 잎」)라는 시행은 컬트적 상상의 극치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건 데이비드 린치건 황학주에게 와서 이 우울하고 음산한, 그러나 묘하게 밝은 화면 조정법을 배워가야 할 것이다. 그 여인이 나가는 입구를 젖은 꽃잎이 날아 내리며 비추는 장면은 영화의 끝 장면으로서나 시의 결미부분으로서 압권이다.
                                                                                                                     이숭원 문학평론가
 
 오래전, 호남의 어느 시인이 이런 계절의 간이역을 소재로 아름다운 시 한편을 작성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시를 모티브로 그의 친구인 소설가가 같은 제목으로 짧은 소설을 한 편 발표했었다. -「사평역」이라고, 그때 그 시와 그리고 후일에 발표된 소설을 읽으며 나도 언젠가 아름다운 시를 소재로 수채화 같은 단편을 한편 써내고 싶다는 강렬한 유혹을 느꼈었다. 거의 삼십 여년이 지난 지금, 그 작품보다 훨씬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 작품(「은하수역, 저쪽」)을 읽으며 나는 다시 한 번 강렬한 유혹을 느낀다. 내 친구 황학주의 이 작품을 언제쯤 소설로 써낼 수 있을까?
                                                                                                                   이경호 문학평론가
 
 
황학주 :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1987년 시집 『사람』으로 등단했다. 『너무나 얇은 생의 담요』등의 시집과 시선집 『상처학교』등을 냈다. 제 1회 서울문학 대상, 제3회 서정시학 작품상을 수상했다. 현재 아프리카민간구호단체 피스프랜드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펴낸 곳 : 서정시학
값 : 9,000원
 
 

<황학주 기사 모음>

사는 게 이토록 고독하고 살이 떨어져나갈듯 힘겹더라도

김태훈 기자 scoop87@chosun.com
2010.03.22 03:03

8번째 시집 '노랑꼬리 연' 낸 황학주 시인
흙에서 나와, 떠돌다 가는… 인생의 사계절 풍경 담아
황학주(56) 시인이 8번째 시집 '노랑꼬리 연'(서정시학)을 냈다. 나고 자라 세상을 떠돌다 마침내 처음 태어난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사계절 풍경을 담은 시 61편을 수록했다. 시집의 첫머리를 여는 작품 '고향'에서 시인은 삶의 시작과 끝이 결국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드러낸다.

'해가,/ 묻히듯/ 갓 익은 복숭앗빛 산 뒤로 넘어간다//(…)//콩밭에 나비 접근하듯/ 할아버지 아버지 차례로 무릎을 안고/ 독방 구덩이로 빨려 들어간 참이다/ 그림자빛 꽃 가까이 간 저녁이다.' 해는 묻히기 위해 산 뒤로 넘어가고, 노인은 무덤 같은 독방 구덩이에 눕는 사멸(死滅)의 이미지가 가득하다.

 
▲ 황학주 시인은“삶이 사막처럼 삭막해 빠질 것 같다면 차라리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바라보자는 생각을 담았다”고 말했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황학주 시인은 1995년부터 아프리카에 드나들며 빈민 구호 활동을 펼쳐왔다. 2004년부터는 아프리카 민간구호 단체인 '피스 프렌드'를 만들고 대표로 활동하며 해마다 3~4회씩 검은 대륙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시인은 하루하루를 견디며 생의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 걷는 사람들을 수없이 만났다.

그의 시에 상처를 기록한 작품이 유독 많은 것은 시인의 이런 NGO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있는 빈민촌 '키베라 언덕'에서 만난 어린 미혼모의 상처도 시집에 새겼다. '가공하지 않은 옷감처럼 부스스한 웃음이 새하얗게 벌어지는 너의 십육세,/(…)/ 아이를 지우자마자 곧바로 늙어져 시내 뒷골목으로 나갈 때 팔찌가 있어야 하는 자리에 벗어놓은 팔목이 월식처럼 마르고 가팔라져 있다.'(수록작 '흑장미 마을')

'사는 것이 이렇게 고독'한 것이고, '발자국은 꼭 살이 떨어져나가도록 걸어가는 것'(수록시 '길')처럼 힘에 겹다. 그러나 시인이 고통의 땅에서 확인하는 것은 절망이 아니다. 황 시인은 "세상에서 나만 상처받고 사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각자의 상처를 견디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신발 깔창 위로/ 물에 빠진 밤이 괴어든다/'면서도 그 물 속에 빠져 익사하기보다는 '여기서 턱을 괴고 깊어지는 것이다/ 한 묶음 꽃이 놓이듯이'(위의 시)라며 그때까지 시를 지배했던 음울한 정조를 단숨에 흩어버린다.

아침에 나와서 저녁에 돌아가는 집의 이미지가 죽음의 냄새를 간직한 고향과 확연한 대조를 이루는 점도 흥미롭다. '노랑꼬리 달린 연을 안고/ 기차로 퇴근을 한다'는 시 '노랑꼬리 연'도 시 '고향'처럼 떠남과 귀환의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는 집은 '아물면서도 가고 덧나면서도 가는' 곳이다. 돌아갈 집이 무덤과 다른 이유는 그곳에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꼬리를 자르면서라도 사랑은 네게 가야 했으니까/ 그것은 막막한 입맞춤 위를 기어오르는 별이었던 것 같다/(…)/ 네게로 가는 별, 댓살 하나에 온몸 의지한/ 노랑꼬리 연 하나 바람 위로 뜬다'(위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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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하듯 떠돌며 사랑을 노래하다

2010년 03월 20일 (토) 03:40   서울신문


[서울신문]모든 시(詩)는 길 위에 있다. 길 위의 시가 가 닿는 시선은 머물지도, 머뭇거리지도 않는다. 끝이 없을 것만 같은 해안선이 이어지는 고흥 앞바다 길에서도, 추풍령 고개 휘적휘적 넘는 걸음에도, 아프리카 케냐의 슬픈 골목을 걸으면서도 시의 애잔한 눈길은 부지런히 움직인다.

길 위에 선 시인(詩人)은 예나 지금이나 사랑을 노래한다. 멀리 달아나지도, 잡힐듯 다가서지도 않은 꼭 그만큼의 거리에 있는 그 사랑을 노래한다. 기차로 퇴근하는 길에서도 쉬 잡히지 않은 사랑을 그리며 노랑 꼬리 달린 연을 꼭 품고 다닌다. 그리고 ‘바람 속으로 바람이 불어와’ 마음껏 하늘을 헤엄칠 수 있기를 꿈꾼다.

시인 황학주(56)가 자신의 여덟 번째 시집 ‘노랑꼬리 연’(서정시학 펴냄)으로 다시 한 번 웅숭깊고 섬세한 서정을 풀어냈다. 전남 고흥에서 아프리카로, 강원도 망상역에서 서울 방학동 반지하방으로, 유목하듯 떠돌며 써내려간 61편의 작품들이다.

그는 “이번 시집에도 사랑에 관한 시들이 많다.”면서 “영원한 사랑 같은 말은 간절하지만, 실제 삶 속에서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시의 몸을 입고 나타나는 것 같다.”고 수줍게 말했다.

길 위에서 스쳐 지나고 떠나버린 모든 것들에 대한 애틋함을 드러내는 매개로 등장하는 것은 기차다.

피서객들 틈바구니에서 힘겨운 삶의 복판에 있는 젊은 어미가 탄 기차는 ‘망상역’을 지나치고, ‘목마름이 심한 별들’을 달고온 사내(은하수역, 저쪽)와 모노레일 협궤에서 간신히 이어지는 위태로운 사랑의 당신과 나(협궤), 그리고 기차 덜컹거리는 사이 떠나버린 누이(수국) 등에 대한 상념으로 이어진다. 또한 ‘갱국’(‘갱’은 다슬기의 방언) 한 그릇으로 돌아본 어머니의 일생은 ‘슬픈 갱도’로 확장된다. 기차는 또한 킬리만자로 코끼리의 슬픔이 담긴 공간(킬리만자로 역)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해 말 서울문학대상, 서정시학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아프리카 민간구호단체인 ‘피스 프렌드’ 대표로 1년에 3~4차례씩 케냐, 탄자니아 등을 찾아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박록삼기자 yyoungtan@seoul.co.kr

삶의 공간에서 끌어올린 서정시

연합뉴스 기사입력 2010-03-18 11:13

황학주 시집 '노랑꼬리 연' 출간



(서울=연합뉴스) 김정선 기자 = 1987년 시집 '사람'으로 등단한 황학주(56)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 '노랑꼬리 연'(서정시학)이 나왔다.

아프리카 민간 구호단체 '피스프렌드'의 대표로도 활동하고 있는 황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자신이 봉사단체를 이끌고 방문하고 있는 아프리카, 고향, 거처가 있는 고흥 등 다양한 삶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 신작 시들을 선보였다.

'킬리만자로 역'이라는 작품에서는 "암보셀리 평원에선 사자도 우리라고 생각했다/아침이면 오래된 가구 같은 구릉들 사이에서/아무렇게나 깨어나도 수(數)가 고스란했다"는 시구처럼 아프리카의 풍경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시인이 머무는 곳의 고요함을 느낄 수 있는 시도 있다. "이 길을 지날 때면/솨르르 눈 밑에 기슭이 번진다/여름이 가는지/귀 안에 물이 든 것 같은 소리,/만져보기도 전 어디에서 꽃그늘은 다 잠겨/해안선이 조용해진다 조용해진 문장들,"('고흥' 중)

신작 시집에서는 특히 사랑과 죽음을 연계해 삶, 만남과 헤어짐 등을 관조한 시가 눈에 띈다. "우리 사랑할 때와 죽을 때/헙수룩한 뗏목여행이라 해도/어디선가 서로의 우연이 되어준 지상의 강물 같은 시간을 추억할 수 있다면"('우연에 가까운 사랑을 미루면 어떤가' 중)

황 시인은 "아프리카에 가서 사막을 접하면 저곳만 넘어가면 될것 같은데 과연 가능할까 라는 생각이 든다"며 "사랑이 없으면 사막도, 죽음도 헤쳐나갈 수 없을 것이라는 깨달음에 사랑과 죽음을 연계한 시들이 많아진 것 같다"고 돌아봤다.

해설을 쓴 문학 평론가 이경호 씨는 황 시인이 "과묵한 시적 서정"을 보여주고 있다며 "이번 시집은 다양한 삶의 공간을 배경으로 삼고 있어 독자들에게 편안한 느낌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jsk@yna.co.kr

사랑이란 모호한 것”

황학주시인 새시집 ‘노랑꼬리 연'



황학주(56·사진) 시인의 새 시집 ‘노랑꼬리 연’(서정시학)에 배인 사랑들은 깊고 아득하고 모호하다. 시인은 “모호한 것이 사랑”이고 “사랑을 하게 되면 모호에 홀린다”고 했는데 이번 시집에 실린 모호한 사랑들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가장 모호하지 않은 선명한 시편이 표제작 같다.

“너의 말 한 마디에 하늘을 날 수 있는 댓살이 내 가슴에도 생겼다/ 꼬리를 자르면서라도 사랑은 네게 가야 했으니까/ 그것은 막막한 입맞춤 위를 기어오르는 별이었던 것 같다// …// 네게로 가는 별, 댓살 하나에 온몸 의지한/ 노랑꼬리 연 하나 바람 위로 뜬다”(‘노랑꼬리 연’ 부분)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꼬리를 흔들며 박차 오르는 ‘노랑꼬리 연’이라는 제목만으로 충분히 회화적인 데다, ‘당신’에게로 가는 하늘 길을 날 수 있는 댓살 하나 가슴에 덧댔다는 구절이 깊다. 꼬리를 자르면서라도 사랑은 당신에게 기어이 날아가야 했다.

“당신 쪽으로 종일 나를 굴린다. 당신은 내게로 움푹해진다. 언틀먼틀 애꿎은 삶의 간격이 들어맞는다. 다툰 일이 있은 어제와는 또다른 얘기다.// 당신은 발을 바꾼다. 그간에 개 짖는 창밖 저녁별 하나가 제자리에 놓인다. 돌아누워 잘 때에도 한 발은 내 발에 얹어 수면(睡眠) 위로 다리를 놓아둔다. 배고픈 쪽이다.// 당신에게 손을 가져간다. 배를 만질 때 찬반(贊反)이 반반인 자세로 몸이 놀란다. 살이 오른 곳에서 배고픈 뒤까지 별이 발길질을 하며 간다./ 종일 자다 물을 먹는 이런 또박또박한 목마름이 있는 우주, 입을 맞춘 첫날 쪽으로, 사랑이 간다”(‘개밥바라기’)

이번 시집에 실린 ‘사랑’의 완결판처럼 다가오는 시편이다. 오래, 제대로 사랑해보지 않고서는 ‘삶의 간격’과 ‘우주의 목마름’을 이처럼 애틋하게 녹여내기는 어려울 터이다. 시인은 “시는 내 사랑이면서 어떻게 나에게 귀한 것이 되었는가를 설명하지 않는다”면서 “운명적인 것이며 사랑은 대체로 운명적으로 왔다 간다”고 언급했다. 사랑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아득함을 앵두와 태양으로 빚어낸 이런 시는 또 어떤가.

“용달차가 앵두 박스를 싣는 동안/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을 헤아리며/ 사다리를 내려오는 해// 오십 그루 앵두 수확이 끝나/ 하루가 정화수 그릇처럼 우묵해지면/ 수평선 밑으로/ 노인이 붉고 큰 앵두를 안고 들어간다// 앵두 씨가 태양의 흑점 어디론가/ 번지는 동안/ 모서리가 부서진 박스인 나도/ 나를 나르기 위해 앵두나무 이불 밑에 두 손을 넣는다”(‘박스 나르기’)

아프리카를 자주 오가던 황학주씨는 이즈음 전남 고흥 바닷가에 집을 짓고 정착했다. 그는 “고흥은 땅끝마을 사람들과 부르는 쓸쓸한 노래”와 같고 “아프리카는 강박이 없는 세계 그 자체”라면서 “시를 쓰면서 한 걸음씩 늙어갈 수 있으니 좋다”고 했다.

세계일보 조용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