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란 시집『분홍이라니』
최정란 시인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독거소녀 삐삐』 『장미키스』 『사슴목발 애인』 『입술거울』이 있으며, 최계락문학상, 시산맥작품상을 수상했다.
▲시평
“예닐곱 마리”의 오리가 길을 건너고 있다. 선두에 선 어미를 따라 길 “이쪽”에서 “저쪽”으로 줄지어 종종거린다.
달리던 차들이 멈춰 선다. 일부는 차에서 내려 오리의 행진을 구경했으리라. 차들이 도로를 달리는 것은 질서,
오리가 길을 건너는 것은 무질서다. 한데 이것은 인간이 정한,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규칙일 뿐이다.
달리는 차들을 멈춰 세운 것은 인간의 질서가 아닌 생명의 힘이면서 윤리다.
아무리 강심장이라 해도 어린 생명들을 짓밟고 지나갈 수는 없다.
오리 떼가 줄을 지어 길을 건너는 것은 자연의 질서이자 생존본능이다.
앞을 놓치면 ‘낙오’되고, 이는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앞에 선 오리를 보고 죽어라 따라간다.
오리 떼가 줄지어 길을 건너는 신기한 장면에서 시가 생겨나고, 오리 떼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는 것을
“이쪽을 옮긴다”는 생각의 반전에서 사유가 발생한다. 시인은 “저쪽에 확실히 무언가 있다”고 확신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미 오리가 새끼들을 데리고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쪽은 위험이 존재하는 현실 공간, 저쪽은 아늑하고도 고즈넉한 이상향이다.
시인은 오리 떼의 목적지인 저쪽을 통해 현실에서 이상으로 나아가려는 인간 존재의 의지를 보여준다.
어미는 선두에서 새끼들을 인도한다. 길을 건너는 잠깐의 위험을 감수해야 이상향에 다다를 수 있다.
오리 떼의 위험한 여정은 길을 건너는 단순 행위가 아니라 현실과 이상을 잇는 “위대한 사업”이다.
이 사업은 한 번만으로 끝나지 않고, 계절마다 반복된다. 순환성과 반복성은 이상향에 대한 인간의 집념이나 욕망을 대변한다.
“길 건너 저쪽이 나란히 줄 선 오리떼가 옮겨오는 이쪽을 기다린다”는 마지막 문장에 이르면 이쪽과 저쪽이 헷갈린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던 오리 떼가 ‘저쪽에서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온다.
새끼들은 다 어미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탈하는 새끼가 생겨날 수 있다.
되돌아가는, 호기심 많은, 반항하는 새끼로 인해 이쪽과 저쪽의 구분이 사라질 뿐 아니라 두 세계는 순환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김정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