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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맛과 멋

제목 벌레 신화 - 이재훈
작성일자 2019-12-10
조회수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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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신화



이재훈





눈물을 흘리지 않는 육체이고 싶어요.

내 몸을 위해 가련해지는

네 몸을 위해 가증스러워지는 밤들.

바닥 여기저기 팔랑거리는 목숨들.

머릿속에서 흐르는 피로 글자를 쓰겠어요.

어떤 두려움도 없어요.

악마의 책을 만난다면

내 살의 무늬를 들어 보이겠어요.

채찍이 내 피부에 감겨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가시가 박혀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갈라져요.

뱃가죽이 찢어져 창자가 흘러내려도

나는 기쁘겠어요.

내 몸이 곪아 칼로 피부를 도려내는 기쁨.

잠자는 육체는 딱딱하고 차가워서 늘 황홀해요.

비감한 게 문제라면 문제지요.

풍습을 거스르고 바람을 거스르고

스승을 거스를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요.

헤진 뱃가죽이 갈비뼈를 비벼 댈 때

나는 늘 목적 없이 웃었어요.

수줍어하며 웃었어요.

그러다 강력히 기었어요.

고백하고 싶은 몸을 찾아 기었어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기 위해

검은 장막을 걷고 딱딱한 길을 넘었어요.

발목은 시려왔지만 뱀의 소리를 흉내 냈어요.

심장처럼 시간을 지켜 주었으면 해요.

나는 다시 이 땅으로 올 거예요.

새로 태어난 우상들.

땅을 호령하는 지배자들에게 말하겠어요.

대지의 증인은 흙이며

흙의 몸은 바로 우리의 시체라고.



 내 몸을 위해 가련해지네 몸을 위해 가증스러워지는 밤들은 멜랑콜리하다.  벌레가 된 화자의 입장에서 피력하며, 그로테스크한 이미지가 처절하다. “채찍이 내 피부에 감겨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가시가 박혀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갈라지며 뱃가죽이 찢어져 창자가 흘러내리는 고통을 강조한다. “내 몸이 곪아 칼로 피부를 도려내는 기쁨은 가학적이며 잠자는 육체는 딱딱하고 차가워서 늘 황홀해요.”에는 지옥처럼 사는 모습이 역설적이다. 세상의 위선과 폭력에 웅크린 채 견디는 약자의 모습이 신화적 상상력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박수빈)